소설과 문학

루쉰 <阿Q正傳(아큐정전)>

Alcibiades 2014. 8. 6. 02:49

 

예전인가에도 역시 내가 이 소설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동양의 전통문화에 대해 작가가 그렇게 강한 비판을 한 만큼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근자에 장밍(張鳴)이란 학자가 가벼운 문체로 쓴 <신해혁명>이란 책을 읽고 보니 다소 생각이 달라졌다. 실은 내가 이 소설을 그렇게 까지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많겠는데, <아큐정전>의 배경은 바로 어느 작은 농촌 마을의 혁명이 나던 해 즉 1911년의 신해혁명을 전후한 때였다. 바로 이것에 대해 모르면 이 소설에 대해 그 만큼 모를 수 밖에 없다. 이 책에 의하면 <아큐정전>에 기괴해 보이는 일들 혁명에 관한 일들은 당시 중국에서 실제로 볼 수 있는 한 풍경을 담은 것으로 생각이 된다. 혁명 당시 루쉰은 실제로 자기 고향마을은 소흥(紹興:샤오싱)에 와서 직접 이 혁명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밍의 책에는 혁명당과 조정이나 군벌 어느 쪽으로부터도 외면 받는 농민혁명에 대한 소개가 있다. "항조운동"이라고 불릴 수 있는 농민들이 세운 "혁명정부"는 폭동으로 규정돼 혁명정부로 부터 탄압받고 그 주모자들은 총살당했다. 지배층인 신사층 그리고 개화파의 혁명은 되지만 농민이 요구한 정부는 안되는 혁명의 이면에 대한 고발이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신해혁명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상대적으로 뒷부분은 대충 읽고 당연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아큐자신의 생각대로 아큐가 혁명당이라고 주장했다가 혁명당이 물러간 뒤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큐의 상황 판단일 뿐 이미 혁명은 이루어져서 아큐의 마을에도 일단은 혁명정부가 새워진(엄밀히 마을 유지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별 실질적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것이고 아큐는 새 정부가 치안의 무능력으로 비판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본보기로 총살된 그런 경우라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혁명전후의 중국을 그린 소설로는 퍽이나 수작(秀作) 처럼 보인다. 그러나, 루쉰의 이 시대의 근본적이 문제는 그 당시 니체 등 "허무주의"와 가까운 작가였다는 점이 "계몽가"로서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아, 개운치 않은 뒷맛을 여전히 내게 준다. 냉소는 그렇다 치고 "허무주의"로 사회를 비판하겠다는 것은 그 두개가 합쳐졌을 때 오히려 뭔가 뒤틀린 삐딱함으로 보게 되는 것이 비단 나만의 경우일지 모르겠다. 혁명의 와중에서도 철저히 소외된 농민과 무산자의 현실은 비웃을 지라도 각성을 요하는 것 까지는 인정할 만도 하지만, 그러니까 이러한 시대에 농민이 어떻게 각성해 스스로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럴려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좀 그렇다. 내 우견(愚見)을 말하자면, 아큐에 대해 그가 가진 봉건적 사상을 그의 치욕의 원인으로 실컷 욕했는데 사실 문제는 당대의 혁명의 사상흐름과 시대동향 역시 아큐에게 불리한 그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라면 이제 혁명을 시작한 당대 중국과 중국인의 입장에서 마치 "칼과 방패를 늘어놓고 함께 팔려는" 것과 같아 몹시 불쾌한 느낌이 있다. 하기야 이름만 좋아 "혁명"이고 "광복"이라지만 민족적으로야 거대한 반식민지의 과정에 있는 이 시대의 동향에 한 작가에게나 실질적으로 무엇이 찬양하고 열성을 가질 게 있겠는가를 생각하면, 작가의 냉소와 실망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