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의 <불새>. 사회의 낙오자이자 불평분만자인 주인공을 위한 변명과 격려와 적당한 위로 아울러 그에 대한 질책을 감미롭게 조화시킨 가장 읽고 싶은 최인호의 소설이다. 특히 예문관의 초판본이 읽기에 한 눈에 들어와 보기 좋고없어진 부분들이 있는 그 후 판들에 비해 내용상 온전하다.

 

악(惡)의 화신(化神)이자 배화(拜火) 혹은 차라리 방화(放火)의 사제인 영후는 수많은 악행과 폐륜에도 단죄받지 않고 오히려 아슬아슬하지만 달콤한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어가지만, 그 몰락이 그가 미란의 마음을 해치는 것으로 그녀의 큰오빠가 가정의 안정과 평화를 깨뜨리는 것을 더이상 방관할 수 없도록 결심케 함으로써 서서히 준비된다. 이에 대한 복수로 그는 영후의 기억하고 싶은 어두운 과거를 되살리기 위한 추적을 시작한다. 여기서 그 대목을 잠깐 살펴볼까 한다.

 

『난, 난, 배반을 당했어요. 오빠. 무시를 당했어요. 그 사실을 오늘 밤에야 알게 됐어요. 그걸 말하고 싶어 오빠를 찾아온 거예요.』

미란은 말을 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에요, 오빠. 이건 무서운 사실이예요.』

『…… 그 사람 말이냐.』

경섭은 파이프를 입에서 떼며 감정없는 목소리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영후란 사람 말이냐.』

『그래요, 오빠.』

미란은 목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오빠의 말대로, 그 더럽고 야비한 미친 사내에게서 배반을 당했어요, 오빠. 하지만 그건 저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건 참 멋진 사실이에요. 그건 우리 집안에 관계된 문제이기도 하거든요. 오빠와 나, 그리고 영섭오빠. 그뿐인 줄 아세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에 관계된 일이기도 해요. 그는 우리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어요.』

『……무슨 이야긴지 알 수 없구나.』

담담한 목소리로 경섭은 말을 끊었다.

『네 얘기는 너무 비약하고 있다.』

『오빠.』

미란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미란아. 그 사내가 너 이외에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단 말이냐. 아니면 너를 버리고……』

경섭은 말끝을 흐리며 미란을 쳐다보았다. 미란은 떨리는 손으로 빈 잔에 술을 따라 성급히 들이마셨다.

『그래요, 오빠. 그 사람은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어요. 그는 나를 배반했어요.』

『그건 당연한 일이다.』

경섭은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난 그 사실뿐이라면 놀라지 않아. 미란아, 너한텐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내는 너를 처음부터 사랑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오빠.』

미란의 얼굴에 비웃는 듯한 냉소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상대가 누군지 아세요? 그 사람이 만난 여인이 누군지 아세요? 이건 멋진 수수께끼에요. 알아맞혀보세요, 오빠. 오빤 어릴 때부터 수수께끼를 곧잘 알아맞히던 척척박사였어요. 난 게임을 하러 온 거에요. 그 게임 때문에 곧장 오빠에게로 달려온 거에요.』

『너는 마치 스무고개라도 한판 벌여보고 싶어하는 사람 같구나.』

『나는 그 사람이 그 누구와 사귀낟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는다. 너 ㅣㅇ외에 누구를 만나고 있더라도 놀라지 않아.』

『……현주에요, 오빠.』

미란은 대어들듯 경섭에게 소리질렀다. 뻑뻑 파이프를 빨던 경섭이 잠시 물었던 파이프를 입에서 떼었다.

『나는 우연히 두 사람의 밀회장면을 보았어요.』

(중략)

『놀라운 일이다.』

신음하듯 경섭은 대답했다. 그는 천천히 담배를 빨아들였다. 나이답지 않게 무성한 흰 머리칼이 깊게 패인 이마의 주름살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잔뜩 지쳐보였다.

『하지만,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의외의 사건은 아니야, 미란아.』

경섭은 얼굴에 부드런운 미소를 띠어올렸다.미란은 충격을 받으며 오빠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절박한 순간에도 변치 않고 떠오르는 저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미란은 어리둥절했다.

『내 말을 이상하게 듣지 마라, 미란아. 난 네가 본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해도 나쁜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네 마음에 달려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 남자를 네가 버린다 해도 네가 어떻게든 극복해나갈 수 있다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너는 내게 대답했었다. 미란아, 너는 그 영후라는 사내를 사랑한다고 내게 말했었다. 난 너의 그 말을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너는 이제 와서 내게 말했다. 배신당했다고, 너는 말했다. 너의 분노가 극복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너와 함께 축배의 술을 함께 들고 싶다, 미란아.』

 

그리고 다음 장면은 거의 막바지에 다달았을 때로 초판 이후에는 빠졌던 부분이다. 경섭은 영후 자신도 몰랐던 과거의 사실까지 추적해 내 영후를 단념케 하려 한다.

 

『열달 후 김선생, 그 여인은 당신의 부정한 씨앗을 낳았소. 그 아이는 당신처럼 아들이었소. 모든것은 되풀이되고 있었소. 당신이 전란통에 그 마을로 들어온 한 미친 여인의 사생아로 태어나 신분을 숨기고 김신부에게서 키워졌듯이, 당신의 그 더럽고 야비한 음행으로 잉태된 씨앗은 똑같은 전철을 밟아 신분을 숨기고 또다시 김신부 손에 의해서 키워지기 시작했지.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 그 아이가 바로 당신이 도망치던 때의 나이처럼 올해 열일곱살이 된 것이오. 김선생, 당신이 어머니만 알고 있을 뿐, 하지만 그 어머니가 어디서 무얼 하던 여인이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미친 여인에 불과했으며, 당신을 배게 한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신분이라면, 당신의 아들 임마누엘군은 당싱의 생(生)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소. 그는 아버지를 모릅니다. 단지 어머니의 존재만 알고 있을 뿐. 하지만 김선생,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때가 되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 아이의 곁을 떠났소. 당신의 단한번의 죄가 한 여인에게 엄청난 비극을 주었소. 그리고 한 아이에게 고아로 행세할 수밖에 없는 비극의 운명을 결정지저우었소. 김선생, 당신이 어릴 때부터 꿈꿔온 욕망과 야망이 당신의 운명을 뛰어넘으려는 고통 끝의 소산이라면 당신은 이제 당신과 똑같은 비극을 당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지 않겠소. 얼굴을 드시오, 김선생. 고개를 들고 겸허한 마음으로 대답하시오.』

(중략)

『당신의 아들이 옆방에 있소. 그 청년은 자기의 아버지가 옆방에 있는지 모르고 지금 깊은 잠에 빠져있소. 그를 만나시오. 용기가 없다면 잠을 깨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잠깐만이라도 그의 잠을 깨우지 않고 살금살금 들어가 잠든 그의 모습을 보시오, 김선생.』

 

이런 경섭의 수완으로도 영후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파멸의 길이 예정되어 있을 뿐이다. <지구인>과 함께 순수문학인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왜 최인호가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인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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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cibia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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