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도예프스키가 신앙에 그토록 전념하게 된 계기가 그가 황제의 특명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간신히 사형을 면한 사건을 든다. 이 도스도예프스키는 본래 <니콜라에프>의 공병학원에서 공학을 공부해 비록 몽상가에 가까웠던 그의 적성에 군인과 공학공부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졸업해서 공병장교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소설을 발표해 문명을 떨치기 시작했으며 러시아사회의 개혁을 위해 프랑스에서 유행한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첫 소설 역시 러시아 최초의 "사회소설"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그는 우리가 "공상적 사회주의"로 아는 베트코프 써클에 가입했다가 그 써클이 해체된 이후 문제의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이 써클은 성페테르스푸르크 문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주의 토론그룹이자 비밀결사로 농노해방 등 사회적 변혁을 추구했다. 이 모임의 활동은 데카브리스트의 난과 마침 전해 발생한 프랑스의 2월혁명에 두려움을 느끼던 황제를 자극했다.

 

황제의 조사위원회는 총살을 결정했고 이 그룹의 6번째 사형수였던 그는 집행일은 1849년 12월 23일 3명씩 처형되는 대형에서 제2열의 3번째 죄수로 사형을 기다렸다. 제1열의 죄수들이 집행을 기다릴 때 황제로부터의 사면령이 도착했과, 도스도예프스키는 시베리아로의 유형생활을 떠나게 된다. 그 후로 그리스도가 그의 삶의 전부였고 설상가상 유배지에서 허락된 책도 <신약성서> 뿐이었다고 한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절박한 순간에 그는 그의 하나님을 만났을 것이며 그 기억이 그의 이후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한 작가가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경우로 최인호의 경우를 그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유고집에서 만큼은 자신이 독실한 신앙인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1987년 6월 7일 서초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아버지의 세례명이던 베드로란 이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도스도예프스키가 본 하나님이 사형의 절박한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그런 하나님이라면, 최인호의 하나님은 그가 여러차례 암시하듯 바로 이 예수의 열두 수제자 중 으뜸이라는 베드로의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왜 그렇게도 예수의 모습으로 이 베드로의 일을 이야기 하는지 정확한 뜻은 알수가 없다. 도스도예프스키에 비해 최인호의 하나님은 그 만이 알 수 있어서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아무튼 베드로는 한 때 예수의 작은 배신자(세번 부인함)였으나 마침내는 예수의 가르침을 알리다 순교하는 인물이다. 상업작가라고 까지 비난 받았던 최인호와 베드로의 추구하는 바나 방식에 무슨 공통점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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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cibia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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