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부터 집에 있언 오래된 헌 책 중에 아직 남은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국문학자 김우종 씨가 쓴 에세이 집(集) <밤이 길어서 남긴 사연>이라는 것이 있다. 1973년 인쇄된 것으로 나오는데 최초 출판년도는 이가 맞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이 사람을 모른다. 청소년기 인기라디오 프로의 청소년문학강좌 식의 문학강좌 프로를 들은 기억이 아련히 있다. 지금도 그의 문학관에 대해 별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 수필에 나온 인생관에도 많이 동의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요즘 생각으로는 어딘지 구태스런 면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정사(情死)가 없어진 것을 한탄하는데서는 묘하게 퇴폐적인 면도 엿보인다.

 

다만, 첫머리의 글과 마지막 글은 그래도 인상적이어서 여기에 한 번 옮겨 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염없이 북을 향한 길을 걸어야 했던 그의 경험에서 유일한 생명의 양식은 그저 "슬픔과 외로움을 하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그사람들끼리만의 사랑과 우정의 다정한 대화, 따뜻한 입김"임을 절실히 느낀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사실로 그처럼 오열(嗚咽)하는 영혼 앞에 칸트의 형이상학이 무슨 힘이 될 것이며 엔사이클로페디아의 박식(博識)이 무슨 맥을 출 수 있다는 것이랴! 수석졸업생이요, 설교의 명수요, 박식으로 백발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은 우리의 참된 슬픔과 고독을 무마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면 그것처럼 무지한 저능아의 교만도 드물 것이다. 사랑과 우정으로부터 배신받은 이 엉터리 사회의 소외자(疏外者)들 앞에 그같은 값싼 박식이 무슨 쓸모가 있다는 것이냐? 나도 비평과 대학강의로 지식을 써먹고 있지만 우리가 진정 슬픈 운명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어떤 도움이 되리라는 자신은 한 번도 가져본 일이 없다.

 

마지막에는 마치 그 시절의 흔하디 흔한 공순이들에게 쓰는 편지인듯 이름모를 "정아"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데 비슷한 이름도 그렇고 최인호의 첫 장편소설로 비련의 여주인공이되는 경아와도 비슷하며 이 한편의 글 만은 역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작가의 소설보다도 더 인상깊어 보인다.

 

 

정아야!

노동에 시달린 너의 영혼이

이젠 조용히 잠들고 또 내일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아니냐?

아름답고 찬란한 꿈의 은총은 잠든 영혼에게만 베풀어지는 것.

꿈은 현실이 아닌데, 너는 꿈 속에서 마저 고아가 될 이유가 없는 것을….

꿈은 가장 자유로운 천국의 무대가 아니냐?

남루한 옷을 벗어버리고 이젠 공주가 되려무나.

시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궁전에 들어가,

네가 가장 원하던 고운 옷을 입고, 네가 가장 원하던 예쁜 구두를 신고, 가장 멋진 모자를 쓰고,

가장 호화로운 무도회에 나가서

영광과 찬미의 원무곡에 맞추어 춤을 추려무나.

 

창밖엔 찬 이슬이 내리는데,

뜰악의 나무 가지들마저

이젠 깊은 꿈나라로 가버렸는데,

정아야,

이젠 그만 잠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아니냐?

자비로운 자장가가 들려오는데

정아야 이젠 고달픈 나그네의 짐을 풀어 놓고 자리에 들어서려무나, 그리고

다음 일요일,

우리 저 숲 속으로

이젠 가마귀들도 찾아오지 않는 갈대밭 사이로

우리 함게 옛이야기를 하며 걸어보지 않으련!

어설픈 문명의 대화일랑은 아예 말기로 하자,

일류대학 뺏지 값으로 더욱 무식해진 젇르의 대화보다 영어 단어 하나 모르는 너의 겸손이 얼마나 더 곱고 진실한 것이랴!

그리고 너의 갈라진 손등

결핵균이 스며든 가슴

슬픔에 지친 눈동자

그러나 세계로 뻗는 코리어의 청사진이 어찌 20만 원짜리 외제를 두룬 여류 명사들의 자랑이랴!

저 별들의 부드러운 속삼임들.

어느날 고지에서 숨진 너의 아버지와 너의 갈라진 손등

슬픔에 지친 동공

결핵균이 스며든 여윈 가슴.

그래서 조국의 번영도 너의 것이거늘…….

 

정아야,

우리 다음 쉬는 날 조용히 저 나목(裸木)들의 숲 속을 걷지 않으련!

그리고 슬픔과 고독의 인종(忍從)으로 해빙(解氷)을 기다리고 있는 저 숭고한 겨울 나그네를 찾아서

내일을 위한 환희의 찬가를 합창해보지 않으련!

 

정아야,

이젠 자야할 시간

별들의 가만한 자장가를 들으며

성당의 종소리 다시 울려

내일이 다시 창가에 와 머무를 때까지 우리 피곤한 영혼을

이젠 달래보지 않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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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cibia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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